• 제43회 미술품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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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 040

달구장운 達句長韻 -

종이에 먹
37x1372.2cm
두루마리/추정 KRW 12,000,000-30,000,000


「달구장운達句長韻」은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 청성 성대중靑城 成大中, 태호 홍원섭太湖 洪元燮, 정수재 이병모靜修齋 李秉模, 선식재 정지순善息齋 鄭持淳, 문희 원득정聞喜 元得鼎과 동병 김득후東屛 金得厚가 1783년 대구에서 서로 잇달아 차운하여 쓴 연작시를 모아 만든 시축이다.

1783년 이덕무는 사근도 찰방沙斤道 察訪, 성대중은 곡강 군수曲江 郡守(흥해興海의 별칭)로, 홍원섭은 달성 통판達城 通判으로, 이병모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로, 정지순은 주천 태수酒泉 太守로 재직중이었고 모두 대구에서 순차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달구장운」은 이덕무가 영재 유득공泠齋 柳得恭의 시에 차운하여 규장각 직제학이었던 철재 정지검徹齋 鄭志儉에게 올린 7언고시를 홍원섭의 관소인 매죽헌梅竹軒에서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덕무가 떠난 후 성대중이 홍원섭을 방문했는데, 두 사람은 떠난 이덕무를 그리워하며 그의 시에 차운하여 각각 시 한 수씩을 지었고, 홍원섭의 문객文客으로 있던 지역 문사 원득정도 함께 시를 남겼다. 원득정은 이덕무, 홍원섭, 성대중의 시에 자신의 것을 모아 '술자리 풍류의 성대함이 근래에 보기 드문 것'이라 칭하며 이병모에게 보여주었고 이에 이병모가 또한 차운시를 쓴 뒤 정지순과 김득후에게 모임에 합류하여 화답시를 쓰도록 청해 총 7명의 차운시가 모이게 되었다.

홍원섭은 이 만남에 대해 '이처럼 기이한 만남은 백년에 한 번 허여한 일[名都往往邂逅奇, 此事百年天一與]'이라고 했고 성대중은 '달구장축은 교남의 성사[達句長軸, 亦嶠南盛事]'라고 자부하였으며 성대중이 남긴 김득후의 행장에 따르면 김득후는 임종을 앞두고 달구장운을 펴놓게 했다고 한다. 당대 저명한 문사였던 저암 유한준著菴 兪漢雋은 「달구장운」을 보고 읊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덕무, 성대중, 홍원섭, 이병모, 정지순은 각각 규장각의 각신과 검서관, 교리 등을 역임하며 중앙무대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고 김득후와 원득정은 경상도 지역 출신으로 문명文名을 떨친 인물들로 사제간이었다. 김득후와 원득정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김득후의 경우 이덕무, 성대중, 홍원섭, 유한준의 문집에 그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칭찬하는 내용이 많다. 원득정은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지방 출신으로, 정지검과 한계 민종현寒溪 閔鍾顯의 청으로 홍원섭의 문객이 되어 이덕무, 성대중, 이병모 등의 인물들과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시축의 가장 앞에는 정지순이 행서로 '달구장운'을 썼고, 그 다음에는 시를 쓴 인물들의 간략한 정보를 밝히는 글이 전서체로 쓰여있다. 말미에 '송맹원서宋孟源書'라고 글씨를 쓴 이가 기록되어 있고 '태화씨太和氏' 라는 인장이 찍혀있는데, '태화太和'는 홍원섭의 자字이다. 『청장관전서』 부록 상의 기록에 따르면 글은 홍원섭이 짓고, 송필연이라는 인물이 소전으로 쓴 것인데, 송필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의 자는 '맹원孟源'이고 홍원섭, 성해응, 위백규의 문집에 간략한 일화와 함께 '은진일사恩津一士', '신안포의新安布衣'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정조대 문인들과 가까이 교유했던 은진송씨로 추정되나 벼슬은 하지 않았던 인물로 보여진다.

이어서 성대중이 여러 색의 종이에 7명의 시 전문을 쓴 것이 십여미터 가량 펼쳐진다. 이덕무의 시를 시작으로 홍원섭, 성대중, 원득정, 이병모, 김득후, 정지순의 시가 차례로 기록되어있고 이는 시를 쓴 순서와 동일하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와 성대중의 『청성집靑城集』, 홍원섭의 『태호집太湖集』에 '달구장운' 혹은 '달구장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 『청장관전서』에는 「달구장운」의 서문과 함께 7편의 시가 모두 전재全載되어있으나 그 실체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또, 『청장관전서』에 공개된 7편의 연작시 외에 홍원섭, 원득정, 성대중의 또 다른 시가 각 1수씩 더 첨부되어있어 흥미롭다.

「달구장운」은 규장내외각 출신으로 당시 경상도 지역에 재임하고 있던 지방관들의 해후邂逅와 지역 출신 문인들의 모임이 라는 자체로 큰 의미가 있고, 일시적 모임이었지만 이를 모방한 다양한 형태의 모임이 이루어지면서 당대와 후대의 문사들에게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 7명 중
이병모, 원득정, 김득후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세 인물의 시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